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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원경스님과 함께하는 33관음성지순례-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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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옥천암 작성일 24-12-23 0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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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원경스님과 함께하는 33관음성지순례-1월◆ 


- 장소 : 용주사(경기도 화성)

- 일자 : 25년 1월 5일(일)

- 출발시간: ★08:00★

- 동참금 : 7만원 (축원포함/환불 불가)

  (국민은행 050701-04-129772 옥천암)

  입금 후 종무소로 꼭! 전화 주시기 바랍니다.

♣좌석은 접수/입금 확인후에  ▶순서대로◀ 배정됩니다.


※성지순례 기도 봉행을 위한 대중공양 및 설판 접수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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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이곳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장할 때 무덤을 돌보는 '능침사찰'로 용주사를 같이 창건하였다. 용주사에서는 사격(寺格)을 높이기 위해 근처에 있던 갈양사(葛陽寺)라는 절을 이었다고 말하지만, 실질적인 창건은 정조 임금이 하였다. 조선 전기의 세조랑 비슷한 이미지.

갈양사는 '갈양사사적기'란 기록으로 보건데 고려시대(10세기)에 확장된 듯하다. 문제는 이 기록이 이능화의 조선사찰전서에 남은 내용이라 원본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려시대 고승들이 지방의 사찰을 산소(山所)로 정하고 거기에서 말년을 보낸 전통이 있었는데, 갈양사도 그러한 절이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고려의 고승인 혜소가 갈양사를 자신이 거처할 장소로 삼아 후대로 내려왔으나 언제인가 망해서 폐사지가 되었다.

그러던 중 18세기 조선 시대에 뒤주에서 죽은 비운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정조가 명을 내려 용주사가 창건되었다. 정조가 재위 13년(1789)에 옛날 수원부 읍치(현재 화성태안3지구)를 현재의 수원 화성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사도세자의 묘를 새로 조성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이름 붙였다.

이듬해 정조 14년(1790)에는 현륭원에서 가까운 갈양사의 옛 터에 새로이 절을 지었다. 특기할 점은 용주사 창건이 정조가 직접 명하여 국가공사로 이루어졌으며, 비용도 각 궁가와 중앙 및 지방의 관가로부터 충당하였다는 것이다. 숭유억불이 기본인 조선시대에는 상당히 이례적인 사례이다. 전설에 따르면 절 건물이 낙성되던 날 밤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입에 구슬을 물고 하늘로 승천했다고 한다. 정조는 (용은 임금의 상징이므로) 왕이 되지 못하고 죽어 구천을 떠돌던 아버지가 비로소 한을 풀었다고 생각하고, 절 이름을 용 용() 자에 구슬 주() 자를 써서 용주사(龍珠寺)라고 지었다 한다.

정조는 재위 19년(1795) 윤 2월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 화성행궁으로 행차하여 아버지가 묻힌 현륭원(현 융건릉)에 참배하였다. 이튿날에는 화성행궁에서 어머니를 위하여 회갑연을 크게 지냈다.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는 동갑이었으므로, 먼저 아버지 무덤에 참배한 뒤 다음 날 어머니의 육순잔치를 한 것이다. '용주사대웅전후불탱화'(경기도유형문화재 제16호)에는 "자궁저하 수만세(慈宮邸下 壽萬歲)"라는 글귀가 있는데, 여기서 자궁(慈宮)이란 임금의 어머니를 뜻한다. 따라서 "자궁저하 수만세"는 '임금님의 어머니께선 만수무강하십시오.'라는 뜻이다. 정조는 용주사를 통하여 죽은 아버지의 명복과 살아계신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동시에 빈 것이다.

일반적으로 절을 창건할 때에는 승려들이 시주받아 승려장인들이 설계와 시공을 전적으로 담당하였지만, 용주사를 창건할 때에는 관아 주도로 비용을 전국에서 모았을 뿐만 아니라 관청에 속한 장인과 승려장인들이 모두 참여하였다. 2006년쯤에 인왕 벽화가 있던 일주문이 천왕문으로 개조되면서 사천왕상이 안치되었다.

2020년 8월 20일 호성전에서 화재가 발생해서 전소했다. 이 호성전은 사도세자, 정조, 혜경궁 홍씨, 효의왕후 김씨의 위패를 봉안하던 곳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인명피해는 없었다. 위패들도 진품들은 용주사 내 효행박물관에 따로 보관하였거니와 특히 정조의 위패는 전시를 위해서 불교중앙박물관으로 옮겨놓았고 호성전에는 복제품을 전시했다. 그래서 진품 위패들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